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설교분류별모음 > 시편강해 - (87). 영광스럽다, 교회여!

양육설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시편강해 - (87). 영광스럽다, 교회여!

시편 87:1-7, 히브리서 12:22-24, 갈라디아서 3:2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10-13

말씀내용
시편 87편은 교회의 영광을 예언적으로 노래한 시편입니다. 이 시편에 감동한 존 뉴톤(1725-1807)은 그 유명한 찬송가의 가사를 썼습니다. 우리 찬송가 210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입니다.
시온 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
허락하신 말씀대로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 흔들 자가 누구랴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 없도다

생명 샘이 솟아나와 모든 성도 마시니
언제든지 흘러 넘쳐 부족함이 없도다
이런 물이 흘러가니 목마를 자 누구랴
주의 은혜 풍족하여 넘치고도 넘친다

주의 은혜 내가 받아 시온 백성 되는 때
세상 사람 비방해도 주를 찬송하리라
세상 헛된 모든 영광 아침 안개 같으나
주의 자녀 받을 복은 영원무궁하도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찬송의 내용을 우리는 87편을 통해 살펴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늘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쇠잔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시편 87편은 눈에 보이는 시온의 영광이 거의 혹은 전혀 없던 시기에 부른 노래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이거나 포로 후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교회에 실망했을 때 불러야 할 노래라고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실망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 시편을 노래해야 할까요? 이 시편을 노래하는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위에 언급한 존 뉴톤의 그 찬송을 부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이클 윌콕은 이 시편에는 두 개의 노래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의 노래와 하나님의 가족의 노래입니다. 1-3절은 하나님의 도성을 노래하고 4-6절은 하나님의 도성의 시민인 하나님의 가족들을 노래합니다. 이 두 주제는 교회에 대한 두 가지 은유인, 하나님의 도성과 하나님의 가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7절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축제의 기쁨을 묘사합니다.


1. 거룩한 도성의 노래 (1-3; 엡 2:20; 히 12:22-24; 계 7:9-10)
먼저 하나님의 도성의 노래를 살펴보겠습니다. 1-3절입니다. 앞에서 이 시편은 교회의 영광이 보이지 않을 때 부르는 노래라고 했는데, 지금으로부터 1600 여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정확히 이 시편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탁월한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4세기 중반에 태어나 430년까지 살았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교회는 로마제국의 인정을 받아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 세대들과는 달리 자유롭게 신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국은 유럽의 북쪽에서 내려오는 게르만 족의 침략과 약탈로 쇠퇴기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는 북아프리카 히포(Hippo)—지금의 알제리—의 주교였습니다. 급기야 410년 8월 24일에는 제국의 수도로 역할을 해왔던 로마가 서고트 족의 침략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427년에는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쳐들어왔고 노년의 아우구스티누스는 히포로 피난 온 많은 사람들을 돌보다가 열병에 걸려 76세의 나이로 주님의 품으로 가게 됩니다. 그가 죽은 이듬해, 히포는 결국 반달족의 손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민했던 문제는 종종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여겨지던 로마가 어떻게 이교도들의 손에 함락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로마는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며 로마의 멸망은 하나님의 도성의 멸망일 수 없고, 로마의 멸망의 원인이 기독교도 아니라는 사실을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걸작을 쓸 때, 그를 사로잡았던 말씀이 바로 시편 87편 3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시편 87:3).”
제가 다소 장황하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를 소개한 것은, 이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비전을 우리 모두 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마치 현실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쇠망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았던 영광스러운 교회도 보아야 합니다.
1절입니다.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시편 87: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산 위에 당신의 기초를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시온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시인은 지금 예루살렘의 시온 산 위에 세워진 솔로몬의 성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터전, 그 기초가 거룩한 산 위에 있습니다. 여기서 산은 복수로 ‘산들’인데, 이것은 예루살렘 언덕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여기서 시온 산을 거룩한 산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기에 당신의 임재를 두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곧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주저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현실에서 교회가 위태로워 보일 때가 있어도, 시인은 이 고백을 통하여 성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 그 기초와 터전은 결코 흔들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신비한 예루살렘인 교회의 터전은 영원하고 불변하며 대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작정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되기를 바라시고, 교회의 부르심과 구원과 유지와 완성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시며 당신의 모든 속성을 사용하십니다. 예루살렘을 에워싼 산들이 교회를 위해 그들의 힘을 빌려주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산에 당신의 터전을 세우셨다면, 어찌 인간이나 역사의 제국들이 감히 하나님의 터전을 허물거나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300 여년 동안 교회와 기독교의 뿌리를 뽑아 없애려고 했던 로마제국은 망했지만, 교회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터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에베소서 2:20).” 교회가 무너질 수 없음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셨고 주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기 때문이며, 그 기초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해 세워졌고, 그 말씀의 선포를 통해 견고하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2절은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곳이 어디인지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시편 87:2).” 시온의 문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대 도시에서 문은 사회, 경제, 법적 활동의 중심지, 모든 생활의 중심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시온에 있습니다. 물론 ‘야곱의 모든 거처’가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모여 사는 어느 도시 보다도 시온의 문을 더 사랑하십니다. 시온이 무엇을 의미하길래, 하나님께서 시온을 가장 사랑하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시온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예루살렘의 시온이라는 지명을 가리키는 게 아님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하나님께서 성전을 다시 세우실 것을 기다리거나 소망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22-24을 보지요.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브리서 12:22–24).”
히브리서 기자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구속 받은 모든 백성이 시온 산에 모일 날을 묘사합니다. 그곳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기서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시온의 문들’은 각 나라와 민족들로부터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모이는 바로 그 자리를 가리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고로 사랑하시는 자리가 바로 그곳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그것을 환상 중에 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요한계시록 7:9–10).”
놀라운 광경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이 환상을 보이셨습니까? 현실 속에서 믿음 때문에 고난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역사의 현실 속에서 교회가 무력해 보이고 쇠잔해 가는 것처럼 보일 때, 요한에게 보여준 이 광경을 믿음의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지금 그것을 이미 예견하며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시편 87편은 정말 놀라운 시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시는 곳이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라는 것을 당연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일 공예배로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가 속한 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곳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주일에 꼭 예배를 우선시해야 합니까?”와 같은 어리석은 질문을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선 것이 아닌,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선택은 당연히 주일의 예배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시편 기자는 3절에서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시편 87:3).”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감을 주어 『하나님의 도성』을 쓰게 하였고 존 뉴톤에게는 [시온성과 같은 교회]를 작사하게 했던 구절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영광스럽다, 교회여!]는 이 구절에서 나왔습니다. 이 시편을 묵상하는 우리 모두가 이 고백을 하며, 모든 절망의 시간에도 이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절에서 시인은 ‘너를 가리켜’라고 2인칭으로 인격화하여 교회를 부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시인은 교회의 영광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예견하기에 이렇게 찬탄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까? 그는 구약성경에 있는 교회에 대한 모든 약속들을 찾아서 묵상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야말로 절망의 모든 순간에 소망의 꿈을 꿀 수 있는 근거이고, 비관주의에 짓눌릴 때에도 낙관의 빛을 볼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시온 산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의 중심지라는 것과 장래에 이 곳에 임할 영광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2. 거룩한 가족의 노래 (4-6; 미 4:1; 사 2:2; 계 21:26; 행 22:28; 갈 3:28; 4:26; 요 3:3; 계 21:8; 요 1:12 )
이렇게 하나님의 도성의 노래가 마치고 4절부터는 그 도성에 살게 될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노래로 연결됩니다. 이 도성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4-7절이 보여줍니다. 특히 4-6절은 거기에 살게 될 시민들을 소개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족보다 친밀한 관계는 없습니다. 가족은 사회에서 후천적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을 통해서 맺어집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가족을 구성하게 될 사람들은 우리가 평범하게 생각할 수 있는 대상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원수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성산에서 일어나게 될 일을 미가와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미가 4:1)…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이사야 2:2).”
지금 시인은 미가와 이사야의 예언을 붙들고 묵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민족들’과 ‘만방’이 이 산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다른 곳에서 더 많이 예언했고, 스가랴와 말라기 선지자도 예언한 것이었습니다(사 19:23-25; 56:6-7; 슥 8:22-23; 말 1:11). 그들이 왜 모여듭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언제 시온 산으로 모여들 것입니까? 말일에, 끝날에 그럴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날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초림에서 성취되고 재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 시온은 모든 나라의 어머니 같은 도시가 될 것입니다.
4절은 모여들 나라들을 소개합니다. 라합은 애굽입니다. 그외 바벨론, 블레셋과 두로 그리고 구스가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반가워할 이름들은 아닙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종으로 삼아 압제했고, 바벨론 역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하나님의 성전을 약탈하고 그 백성을 자기 땅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던 나라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옆에서 언제나 그들의 원수가 되었던 나라이며, 두로는 물질의 우상을 섬기는 탐욕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구스는 지금의 이디오피아 지역으로 먼 나라를 대표하는 것 같습니다. “라합과 바벨론이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4절의 화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안다는 말은 나를 믿고 예배하고 경외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의 환상과 일치합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요한계시록 21:26).”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에 대하여는 “이것들도 거기서 났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시온 태생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하던 이교도들이 시온의 태생이라고 여겨진다니 무슨 말입니까? 로마제국의 시민권은 나면서부터 생래적으로 가진 시민권과 다른 신분으로 살다가 돈이나 기타 방법으로 시민권을 취득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천부장에게 자기는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이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행 22:28).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이등 시민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 애굽, 바벨론, 블레셋, 두로 그리고 구스 모두가 ‘거기서 났다’고 말씀합니다. ‘났다’는 말은 5절과 6절에서 계속 반복됨으로써 특별히 강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은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합니다. 4절에서 민족을 말했다면 5절은 한 사람 개개인을 말합니다. 주전 3세기,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은 5절의 번역을 조금 달리합니다.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을 ‘어머니 시온이 말하기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마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라디아서 4:26).”고 썼을 때, 70인경의 이 구절을 인용했을 것입니다.
시온이 어머니라는 말은, 교회가 성도들의 어머니라는 말과 같은데, ‘났다’는 말이 강조되는 것도 이 개념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기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교부였던 키프리아누스(200?-258)는 이런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교회를 자기의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이후, 로마 가톨릭은 교회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처럼 이 말을 왜곡 과장했으나 사실, 이것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교회가 기능적으로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특히 요즘과 같이 교회 없이 신앙 생활을 하겠다는 움직임이 많은 시대에 깊이 생각해볼 말씀입니다.
6절은 이것을 보다 그림 같은 언어로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시편 87:6).” 마치 하나님께서 출생신고를 하시는 것처럼, 또는 인구조사를 하시는 것처럼, 그 수를 세고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확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4-6절에서 강조한 것, 바로 ‘거기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표현이 주님이 오신 뒤에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거듭남을 미리 말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요 3:3). 거듭남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는 교인 등록을 할 때, 이 문제를 묻고 점검합니다.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에 던져짐을 피할 수 없다고 성경은 단언합니다(계 21:8).
요한복음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라고 선언합니다. 구원은 다시 태어나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에서 이 일을 행하십니다. 시인이 지금 노래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루어질 일을 멀리서 보고 노래한 것입니다. 시인은 당장의 현실에서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만 본 것이 아닙니다. 장래에 한 없이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3. 희락의 나라 (7; 사 12:3; 롬 14:17)
이제 7절을 봅시다.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이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시편 87:7).” 이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도성에서 누리는 축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성취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노래하는 자와 뛰어 노는 자들’은 ‘춤 추는 자들과 같이 노래하는 자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축제의 현장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합니다.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고 말입니다. 근원은 샘물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모든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 시온에서 흘러나온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구원의 우물물이 교회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이사야 12:3).”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한 대로(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희락, 기쁨의 나라입니다. 존 뉴톤은 이 구절을 이렇게 영광스럽게 찬송의 가사로 다시 썼습니다.
생명 샘이 솟아나와 모든 성도 마시니
언제든지 흘러 넘쳐 부족함이 없도다
이런 물이 흘러가니 목마를 자 누구랴
주의 은혜 풍족하여 넘치고도 넘친다


4. 교훈과 적용 (빌 3:20)
이제 이 시편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봅시다. 여러분도 교회에 대해서 실망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종종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교회를 찾아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교회가 지상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만일 당신이 찾던 최고의 교회를 찾았다고 확신한다면 절대로 그 교회에 등록하지 마십시오. 바로 당신 때문에 그 교회가 흠을 갖게 될테니까요.” 이 땅에 온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온전함을 향해 많은 멀미를 하면서 항해 중인 교회일 뿐입니다. 이 여정에서 필요한 것은 이중 시각입니다. 신자는 두 가지를 보는 사람입니다. 현실과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현실 앞에서 보는 교회는 볼품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으로 보는 교회는 한 없이 영광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의 교회를 보고 실망할 때가 있지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전으로 보는 교회의 아름다움과 영광 앞에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인성을 입으심으로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고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으셨던 영광의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암울한 교회의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장래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교회의 영광을 멀리 내다보며 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시인과 같이 “영광스럽다, 교회여!”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존 뉴톤과 함께,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없다”고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교회에 속한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서 3:20a).”라고 말씀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영광스러워 보이기는 커녕 쇠잔해가는 볼품 없는 교회에 속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교회에 속한다는 것의 궁극적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참 믿음과 고백을 따라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하늘의 시민권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한인들 가운데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라의 주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이겠지요. 하늘의 시민권을 어찌 그것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세상의 어느 회원권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보장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속한 교회를 더욱 사랑하십시오.
끝으로 또 하나의 적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이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주일의 공예배와 수요기도회와 같은 것이겠지요.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그 자리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87편은 지역 교회를 넘어, 우주적 교회—전세계의 모든 신자로 구성되는 교회를 사랑하라고 촉구합니다. 교회가 영광스러운 성숙에 이르게 될 때, 모든 지역교회와 모든 교단이 하늘 하나님의 도성의 문들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바로 그 예배의 자리,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자리, 그 날을 사모하고 바라보십시오.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