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변절을 경계하다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말씀내용
5장. 영적 무지가 깊은 기도의 장애물이다.(찬 363)
1.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것은(4:16) 절대적으로 중보자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점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의 존재를 설명하고 주님은 대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는 큰 대제사장이심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도록 격려한다. 먼저 기자는 구약의 대제사장의 조건과 자격을 말한다. 무엇보다도 대제사장은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4) 연약한 자들을 동정할 수 있어야 한다(2). 구약의 대제사장은 비록 자신이 희생제사를 담당하긴 하지만 그 자신도 죄인이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3) 자기도 제사가 필요한 존재였다.
2. 그리스도도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성부)께서 저더러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고 하심으로 대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으셨다(5). 주님은 아들이면서(5)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다(6). 그는 아론의 계열에 속하신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요, 왕이었던 멜기세댁의 계열에 속한 대제사장이시다(6). 주님께서는 또한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으셨다”(7).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깊은 기도를 통해 십자가를 감당하실 수 있는 평안을 주셨고, 이것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을 다시 얻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주님이 여기서 보여주신 모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 즉 ‘공경하는 복종’(reverent submission)이다. 이 결정적인 시간에 주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과 뜻을 거역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또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사 온전하게 되셨다(8~9). 이는 주님께서 순종을 모르다가 배우셨다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그의 순종의 필연적인 부분이었다. 온전하게 되셨다 함도 이전에는 불완전하다가 온전하게 되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삶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세주가 되기에 온전히 합당하게 되셨다는 뜻이다. 순종은 주님만이 아니라 당연히 우리에게도 요구된다. 9절은 ‘믿는 자에게’라고 하지 않고, ‘순종하는 자에게’라고 한다. 믿는다는 것은 곧 순종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매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성경은 어디에서도 즉각적이고 단회적인 순종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신앙은 지속적 순종이다. 주님은 우리의 합당한 대제사장이 되시기에,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3. 히브리서 기자는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여기면서 이것이 히브리서를 읽는 수신자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듣는 것이 둔하다’는 것은 게으르다는 말이다(11). 6:12에 ‘게으르지 아니하고’와 같은 단어다. 즉, 말씀을 배우는 일에 게으른 태도를 가진 자들을 히브리서 기자는 책망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서 어른이 되어야 마땅한데 아직도 어린 아이이고, 선생이 되어야 마땅한데 아직도 학생인 사람들을 책망한다(12). 이제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가르쳐야 할 텐데,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은 영적 무지로 말미암아 교리적으로,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른다. 그러나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들은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다(13~14). ‘의의 말씀’은 바른 교훈, 바른 교리를 가리킨다.
4. 신자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주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사역을 알면 알수록 더욱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기도의 삶이 깊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자의 무지는 모든 분별력을 잃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하며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영적 어린 아이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과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의 말씀을 배우고 경험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라. 이 일에 게으른 자는 결코 깊은 기도 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으며 온전한 신앙으로 설 수 없다.
5.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의 연약을 경험하시고 동정하시는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알며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에 깊은 기도로 나아가 교통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또한 주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조금도 게으르지 말게 하사 저희로 믿음에 장성한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