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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0~41편.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신 순종과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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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0~41편.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신 순종과 헌신

시편 40편.41편 / 김형익 목사 / 새벽말씀묵상 / 2012-09-01

말씀내용
40~41편.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신 순종과 헌신 (찬 144)

1. (40편) 40편은 다른 메시아 예언시와 같이 다윗의 경험과 그리스도 예언이 오버랩되면서 나타난다. 먼저 개인적 감사가 나온다(1~3). 끈기 있게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주님의 특징적인 모습이었다(1). 주님께는 조급함이 없었으며 그 입술은 더욱 그러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헤롯과 빌라도 앞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그러하셨다. 기다리시면서 주님은 간구하셨다. 예수님도 간구하심을 통해 응답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교훈이다. ‘기가 막힐 웅덩이’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절망의 웅덩이이고, 수렁은 빠져 나오려 할수록 더 깊이 빠지는 늪수렁이다(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발을 반석 위에 두사 흔들리지 않고 빠지지 않게 하셨다. 우리도 그런 경험을 하지 않는가? 아무 소망 없이 미끄러져가기만 하는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견고하게 세워주신다. 구원을 경험하고 부르는 새 노래는 하나님께서 우리 입에 두신 하나님의 선물이다(3).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는 구원의 노래는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능력이 된다.

2. 4~5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언한다. 4절은 시편 1편을 생각하게 한다. 누가 복 있는 자인가? 어떤 자가 행복을 누리는가? 그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다.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않는 자다. 왜 돌아보지 않는가? 거기에는 아무 소망도 구원도 기쁨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살고 죽으셨다. 주님이 받으신 광야의 유혹을 묵상해보라. 먹을 것과 명예와 권력을 주님은 쳐다보지도 않으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믿음은 한눈을 팔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행하지 않으신 것이 없고, 그 모든 것을 다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5). 우리는 그것을 헤아릴 수 조차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전지하심 안에서 나온 것들이다. 하나님은 목적 없이, 생각이나 의도 없이 행동하지 않으신다. 그 많은 생각은 우리를 향한 것이다. 다윗은 그 많은 주의 생각을 다 헤아릴 수 없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시는 생각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헤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리는 자리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왜지요? 주님?”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을 묻는 자세다.

3. 다윗은 이 모든 신앙 고백 위에서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6~10). 6절은 히브리서 10:5 이하에 인용된 본문이다. 두 본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칠십인역 성경을 사용하여 의미를 해석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5-7).” 본문 6절에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이라고 한 부분은 출애굽기 21:6에서, 자유의 신분이 되어야 할 종이 주인과 처자를 사랑해서 자발적인 종이 되고자 할 때 종의 귀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 의식을 지시하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외적인 번제나 속죄제, 제사나 예물이 아니라 마음이며,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자발적이고 기쁨에 찬 순종이다. 히브리서는 7절이 예수님에 관한 말씀임을 확증한다. ‘그 때’는 사람의 곤경(구원받지 못하는)이 제사와 예물을 통해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때’다. 바로 그 때 주님께서 자발적인 종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8절은 예수님께서 단지 외적으로 율법을 지키고 순종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법을 마음 중심에 두셨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셨음을 보여준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병이나 곤경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관련되었다. 따라서 그런 일은 전체에게 알려져야 했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도 전체에 공포되어야 했다(9). 하나님께서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지신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들로 부름 받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증거한다(10). 하나님의 성실과 구원, 인자와 진리를 선포한다. 예수님의 영광을 볼 때 사람들은 아버지의 영광을 보았고 은혜와 진리의 충만을 보았다(요 1:14). 예수님은 삶과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아버지의 구원과 성품을 증거하셨다. 우리 역시 그 부르심을 안고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다.

4. 마지막 부분은 억압과 곤경에서의 구원을 간구하고 대적들이 파멸될 것을 청원하는 기도다(11~17).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끊어지는 고통을 겪으셔야 했으나 그 고통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온유한 배려를 간구하신다(11). 이것은 간구라기 보다 주의 인자와 진리가 당신을 보호할 것라는 예수님의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12절부터 17절까지는 시편 70편과 거의 동일하다. 아마 하나의 독립된 시로 쓴 것을 연결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이야말로 ‘수 많은 재앙’이라고 할 사건이었다(12). 주님은 당신께 전가된 모든 택자들의 죄악을 ‘나의 죄악’으로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으셨다. 실로 머리털보다 더 많은 죄악이다. 13절은 그 잔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진노의 잔을 마시는 동안에도 지켜달라는 간구다. 멸하여지기를 바라는 궁극적인 원수는 사탄 마귀다(14~15). 그러나 주를 찾는 자들은 주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16).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우리를 위한 이 기도의 줄을 놓지 않으셨다.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구원의 광대함을 알고서 여호와는 광대하시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17절은 십자가 상의 예수님 뿐 아니라 인생의 질고를 지고 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우리는 주 없이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생각하시며 주가 나의 도움이고 건지시는 자심을 잊지 말라.

5. (41편) 41편은 다윗이 가난한 자들을 감독하고 돌아볼 자들을 임명하면서 지은 시로 보인다(아람어 역본의 머리말). 교회는 늘 가난한 자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는 교회 안의 사람들이고 다음으로 교회 밖의 사람들이다. 1~3절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볼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4~9절은 다윗 자신의 경험이다. 10~12절은 다시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복 있는 사람’이 가지는 확신을 표현한다. 13절은 제1권(1~41편)의 모든 내용에 대한 화답 송영이다. 제1권은 복있는 사람으로 시작해서(1:1) 복있는 사람으로 마친다(41:1).

6.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육체적으로는 건강이 약하거나 장애가 있고 가정적으로는 기댈 가족이 없거나 적어서 외롭고 명성으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며 영적으로는 낙심에 처한 사람들이다(1). 주님의 말씀대로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있다(요 12:8). 이런 자들을 알아주고 찾아 돌보아 주는 자는 복이 있다(행복하다). 여기서 ‘보살핀다’는 말은 그런 사람들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행에 싫증 내지 않고 보다 꾸준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며 역겨움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인내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 이상으로, 신중한 판단력으로 시간과 관심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1절이 말하는 ‘복’은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일차적 보상이고 약속이다. 그는 적은 것으로 큰 것을 얻는 사람이다. 다윗은 이들을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을 소개한다. 그것은 “재앙의 날에 저를 건지신다”는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이다. 이것은 재앙을 만나지 않고 어려움이 없다는 약속이 아니다. 재앙이나 어려움이 닥쳐올 때 하나님께서 건지시겠다는 약속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행한 모든 숨겨진 선행과 봉사는 하늘의 창고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과 같다. 2절은 부차적으로 주어지는 복을 언급한다.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시고 생명을 보존하신다. 그를 원수에게 맡기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주시나이다(3).” 얼마나 자상하고 감미롭고 부드러운 말씀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 우리의 간병인이 되어주시고, 우리가 병에 걸려있을 때 우리를 고쳐주시는 의사시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알았고 이것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가 누릴 복이다.

7. 다윗은 자기 경험을 회상한다. 다윗은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며 살았으나 막상 자기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아무도 곁에서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하나님 만이 그의 도움이 되어주셨다. 인간적으로 큰 외로움을 경험했겠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특권을 누렸다. 4절은 다윗의 고통이 그의 범죄와 관련되었을 보여준다. 이때 원수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몸이 아픈 다윗을 저주하며 죽기를 바랬다(5). 그들은 다윗에게 거짓을 말했고 나가서 그를 비방했다(6). 그들이 말한 ‘악한 병’은 귀신 들림처럼 못된 병을 일컫는다(8). 그들은 다윗이 다시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했다(8). 신자는 결코 이런 악인들의 자리에 설 수 없다.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다윗을 배신하여 그를 향해 발꿈치를 들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9). 이것은 주님께서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는 상황에 적용하신 말씀인데(요 13:18). 다윗 자신도 이런 배신을 경험했다. 자기는 가난한 자를 살피고 살았는데 자신이 곤궁하게 되자 아무도 자기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으니 불평이 나올 만 하지만, 다윗은 세상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보심을 경험한다.

8. 10절의 기도는 보복적으로 읽힐 수 있다.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구약의 이런 기도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을 향한 배역과 거부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분노와 심판의 정서를 공유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개인적 차원의 보복이 아니라 왕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려는 마음을 드러낸다.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던 원수들이 그들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고 주께서 자신을 기뻐하고 계심을 확인한다(11).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진실함(integrity)이다. 그것이 12절에 ‘온전한 중에’라는 말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진실함을 아시고 나를 붙들어주시며 나를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신다고 다윗은 확신하여 고백한다(12).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다.

9. 41편은 그리스도인이 가까운 친구의 배신으로 외로울 수 있지만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친밀하심과 도움을 경험하는 복을 누린다고 말한다.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어준 사람들에게 말이다. 당신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가? 이것은 돈이 많고 적은 문제가 아니다. 주의 말씀을 기억하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가난한 사람은 늘 교회 안팎에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다.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며 그들이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셨다(마 10:40~42). 그 작은 자는 누구인가? 주님은 또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지고 바다에 빠지는게 낫다고 하셨다(마 18:6). 사람들이 무시하고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마 18:10,15).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우리도 이렇게 이 말씀에 화답하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10. “저희의 머리털보다 많은 죄악을 친히 담당하신 주님, 오늘도 가난하고 궁핍한 저희의 도움과 건지시는 이가 되심을 인하여 감사하나이다. 주께서 저희 가난함을 아시고 찾아와 보살피시듯이 저희도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삶을 살도록 믿음과 은혜를 더해주시옵소서. 주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사 자원하여 순종하셨던 것처럼 저희도 그런 순종으로 저희 자신을 주께 드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