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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장. 결혼과 독신, 어느 자리에 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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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장. 결혼과 독신, 어느 자리에 있든지

고린도전서 7장 / 김형익 목사 / 새벽말씀묵상 / 2015-09-02

말씀내용
7장. 결혼과 독신, 어느 자리에 있든지 (찬604)

1. 교회를 허무는 사탄의 두 전략은 도덕적 더러움과 교리적 혼란이다. 분열과 성적 부도덕이라는 사탄의 전략을 다룬(1~6장) 바울 사도는 이제 사탄의 두 번째 전략, 교리적 혼란 문제를 다룬다(7~16장). 언제나 도덕적 더러움은 교리적 혼란에서 나온다.

2. 먼저 결혼에 대한 가르침이다. 독신 생활은 좋지만 결혼 생활은 자연스럽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는 말은 유대인의 전통적 경구로서 독신 남자를 비난하지 말라는 뜻이지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 아니다(1). 사도는 이 말로써 그리스도인의 독신 생활이 비난 받을 일이 아님을 밝힌다. 독신은 오히려 주님을 섬기는데 유익하다(7). 독신과 결혼은 부르심의 문제이지, 신앙적 우열을 가리는 문제가 될 수 없다. 한편, 율법주의자들은 세상의 성적 타락에 대한 반응으로써 성적 부도덕을 피하려면 결혼이나 결혼한 부부의 성관계를 금해야 한다는 부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도는 그것을 부인한다. 결혼과 결혼 안에서의 성관계는 자연스러우며, 성적 욕구는 결혼 관계 안에서 해소되어야 한다(2,9). 이 말이 허락이고 명령이 아니라는 것은 2절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6).

3. 사도는 결혼에 대한 몇 가지 신앙 지침을 준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일부일처여야 하며(2) 동성간 결합은 결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결혼은 서로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3~4). 자기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날 법이나 관습 속에서 가장 무시되고 부인되는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부부생활의 금욕은 서로의 동의 하에 금식이나 기도를 위한 영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잠시 동안 허락되어야 한다(5).

4. 율법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성에 대한 부정적 생각 때문에 이혼을 해야 한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인 부부들과 불신 배우자와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한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결혼이 영적 삶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서는 안 되며 이혼은 더더욱 안 된다(10~11). 이혼의 합당한 사유는 배우자의 음행인데, 이 경우도 이혼이 허용되는 것이지 이혼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마 5:31~32; 19:3~9; 막 10:2~12; 눅 16:18). 이미 이혼했다면, 그는 그 상태로 지내거나 다시 전 배우자와 합하는 것이 합당하다. 사도는 지금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10).

5. 불신 배우자를 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권면은, 불신자와 결혼할 자유를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은 주 안에서만 할 자유가 주어졌다(39). 여기서는 주님을 믿기 전에 결혼했다가 한 사람이 먼저 주님을 믿게 된 경우다. 이 경우에도 두 가지 상황이 있는데, 하나는 불신 배우자가 계속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다. 전자의 경우 이혼해서는 안 되는데, 불신 배우자가 그리스도인 배우자를 통하여 거룩해지고 그 자녀도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12~14). 그러므로 불신 배우자와 사는 그리스도인은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런 거룩해지는 역사가 나타나도록 지혜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불신 배우자가 이혼을 원한다면 그리스도인 배우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혼의 발의는 불신 배우자만이 할 수 있다. 여기서 불신 배우자의 이혼 요구를 듣지 않음으로써 싸움과 논쟁으로 화평을 깨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이혼을 요구하는 불신 배우자의 영혼을 위해서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렇게 해서 그 영혼을 구원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16). 사도가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고 언급을 하는 것은 이것이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고, 주님 자신이 세상에 계실 때 분명하게 주셨던 가르침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혼하지 않은 것을 훈장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결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 안에서 하나가 되어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이혼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패의 족쇄가 되어서도 안 된다.

6. 사도는 이와 연관하여,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의 상태가 하나님을 못 믿게 하는 제약이 되지 않음을 설명한다(17~24). 그가 자유인이든 종이든, 할례를 받은 사람이든 아니든, 독신이든 결혼했든, 어떤 결혼 생활을 하고 있든,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19).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어떤 상태도 그 일에 제약이나 핑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이러면 주님을 더 잘 섬길텐데” 라는 말은 합당한 말이 아니다.

7. 이제 사도는 처녀들에게 말한다(25~35). 처녀들이 독신으로 그냥 지내는 것이 좋을 특별한 상황은 임박한 환난 때문이다(26). 네로 황제 치하의 극심한 박해를 앞두고 사도가 한 말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보편적인 몇 가지 상황과도 연관된다. 첫째는 육신의 고난인데, 결혼생활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지만, 타락 후에 결혼은 고난을 동반하는 선물이 되었다(28). 둘째는 인생이 짧다는 것이다(29). 이것은 결혼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결혼생활 자체가 그저 잠깐이며(독신도 마찬가지다), 슬픔이나 기쁨도 잠깐 지나가는 것임을 알 것이고, 재물과 인생의 쾌락에도 집착하지 않을 자유가 생기는 것이다(29~31). 결혼은 영원하지 않다. 결혼을 생각할 때 고려할 사항은, 결혼생활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독신은 삶 전체를 주님을 섬기는데 쓸 수 있지만, 결혼을 한 사람은 배우자를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것을 미리 생각해야 한다(32~35). 이것은 결혼한 사람에게는 당연하고 합당한 일이다.

8. 다음에 사도는 결혼할 처녀를 딸로 둔 아버지들에게 권면한다(36~38). 다수의 고린도 교인들은 자식을 결혼시키지 않는 것이 더 영적인 삶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사도의 가르침은 결혼을 시키든 안 시키든 어느 것이 더 영적이지 않으며, 독신이든 결혼이든 부르심에 따라 하라는 것이다. 사도는 마지막으로 사별한 과부들에게 권면함으로 결혼에 대한 가르침을 마무리한다(39~40). 그들은 다시 결혼하든지 독신으로 계속 살든지 자유하다. 다만 결혼을 한다면 ‘주 안에서만’ 믿는 자와 결혼할 수 있다. 사도는 그러나 혼자 지내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이라는 권면을 잊지 않는다.

9.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결혼 생활과 독신 생활에 대한 포괄적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우리가 결혼생활을 영위하거나 독신생활을 영위하거나, 혹 결혼하였거나 이혼하였거나, 또 자식의 결혼을 앞두고 성경적 가르침을 찾고 있거나 간에 본문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기 때문에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더 열등하다고 생각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다. 결혼은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다. 그러나 죄인의 결혼은 많은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이 모든 삶 속에서 자신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어떻게 주를 더욱 힘써 섬길 수 있는지 주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10. “하나님 아버지, 결혼의 정의와 실천이 무너져가는 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개인의 삶에서 성적으로 방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혼과 독신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지켜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저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저희 주인되심을 알고 인정하며 그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