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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이신칭의의 복음을 양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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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이신칭의의 복음을 양보할 수 없다.

갈라디아서 2장 / 김형익 목사 / 새벽말씀묵상 / 2012-09-26

말씀내용
2장 이신칭의의 복음을 양보할 수 없다 (찬 397, 344)

1. 사도 바울은 회심 후 14년째 되던 해, 바나바,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했다. 이때는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섬긴지 1년쯤 지났을 때였을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안디옥 교회의 헌금을 전해 주기 위한 예루살렘 방문이었다(행 11:30).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는 말은 아가보 등이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한 일을 가리킬 것이다(행 11:27~28). 사도 바울은 이 때 유명한 사도들 즉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 같은 이들에게 개인적 차원에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설명했다. 이 말은 이 만남이 나중에 열린 예루살렘 공의회와 같은 성격의 공적 회의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행 15). 사도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수고가(특별히 이방인들을 위한) 헛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사도는 이때 의도적으로 헬라인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게 함으로써 자기가 전하는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했다(3). 비록 이것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문제를 삼음으로써 시비거리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를 엿보고 신자들을 종으로 삼으려는 자들인데, 바로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혔던 자들과 같은 이들이다(4). 만일 사도 바울이 이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한 번이라도 양보했다면 그것은 복음의 진리를 거스리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5). 갈라디아 사람들은 유명한 사도들의 이름을 많이 의식했는데 그 유명한 사도들이 사도 바울에게 전해 준 것은 없다(6). 도리어 베드로와 바울은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는 영역을 나누었고(7~8) 사도들 사이에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이견이 없었다(9). 오직 하나의 복음만 있을 뿐이다. 이때 사도 바울이 이방인 교회를 담당하는 자로서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사도들로부터 부탁 받은 일만 있을 뿐이다(10).

2. 하지만 문제가 터졌다.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을 때였다(11). 당시 초대교회는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 그들에게 어떤 요구를 할 것인가의 문제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이 때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는데, 안디옥은 이방인 신자가 유대인 신자 보다 다수를 차지하는 최초의 교회였다.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로부터 보냄을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오자(이들은 사실 야고보의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많다, 행 15:24), 갑자기 식사 자리를 떠나는 위선을 했고 이것은 바나바와 다른 유대인들의 마음에 유혹이 되었다. 이것을 본 바울은 공중 앞에서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는데 이 행위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복된 진리 즉 복음의 핵심을 삶으로 부인하는 행위와 같았다. 베드로의 행위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상대가 베드로였음에도 불구하고 면전에서 그리고 공중 앞에서 그를 책망하였다. 물론 베드로가 잘못을 인정하고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였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했기에 초대교회는 분열 대신,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하나로 공고히 세워져 갈 수 있었다.

3. 이처럼 칭의 교리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모든 차이를 무효화한다. 오직 믿음으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16). 이방인 신자들은 더 이상 유대인 신자들 앞에서 기가 죽어야 할 필요가 없다. 복음 앞에서, 그리고 완전한 거룩하심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도덕군자나 살인강간범이 모두 죄인일 뿐이다. 이신칭의 교리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반대를 받아왔다. 반론의 핵심은 이 교리가 죄를 조장한다는 것이다(17). 이신칭의 교리만 믿다가 나중 심판날에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면 어쩔 것이냐는 말이다. 그러나 사도는 결코 자신이 이전에 믿던 유대교가 가르쳤던 이행칭의의 교리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며 다 허물었던 그 교리를 다시 세우지도 않을 것이다(18).

4. 사도는 이신칭의 교리로부터 네 가지 원리를 도출한다. 1)나는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 나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주는 방법으로서의 율법은 파괴되었고 나는 그런 칭의의 수단으로서의 율법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죽었다). 나는 이제 율법의 지배로부터 자유롭다! 하나님을 향해서 살려면 율법의 행위에(자존심, 자기의) 대해서 죽어야 한다. 2)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스도와 별개로 이루어지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죄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았음을 의미한다. 3)내가 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연합의 교리는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이다. 이것은 신비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보시고 나를 판단하신다. 4)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비록 칭의의 선물을 받았지만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산다. 구원얻는 믿음의 참된 특성은 지속(인내)하는 믿음이다. 그것은 한 번 혹은 한 때의 믿음이 아니다.

5.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할 수 없다(21). 갈라디아 사람들이 계속해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복음을 따라가려 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헛되고 욕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 된다. “칭의의 교리를 잃어버리면 기독교 교리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라고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그리고 토마스 크랜머의 말이다. “이신칭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의 헛된 영광을 뒤엎는다. 이를 부인하는 자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적수이며 인간의 헛된 영광을 드러낸다.” 이 은혜의 복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자. 이 은혜의 복음을 더 알게 해주시기를 구하자. 그리고 이 은혜의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게 살기를 구하자. 십자가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기를 구하자.

6.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행위로 의로울 수 없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저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일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이 은혜의 복음을 더 알게 하시고 이 진리에 합당하게 살게 하사 오직 십자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혜를 주시옵소서.”